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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르 연극(창작), [테마] 연인 또는 부부, [테마] 퇴근 후 직장인들, [추가분류] 앵콜, [추천연령] 전체, [추천성별] 전체
공연일자 2012-09-08(토) ~ 2012-09-23(일)
공연장소 예술공간 서울
공연시간 평일 오후8시 / 토요일 오후4시,7시 / 일요일 오후3시 / 화 쉼
관람등급 만 19세 이상
출연자 장용철, 정종훈, 권기대, 오용택, 이선희
티켓가격 20,000원
러닝타임 90분
제작 주최,주관: 서울연극협회/후원: 문화체육관광부,(사)한국소극장협회,우리투자증권
공연문의 02-764-7462
홈페이지 http://cafe.daum.net/artspaceseoul
할인정보 종로구민50% 외 아래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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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가 온다

귀뚜라미가 온다

최고 관리자 / 2012-10-20 / 조회수 8067

섹슈얼리티와 폭력의 이중주

- 프로젝트 그룹 휘파람, <귀뚜라미가 온다>

 

구현경(건국대 박사과정 수료)

관극일시 : 2012.09.13

각색: 장용철 (소설원작: 백가흠)

연출: 박장렬

극단: 프로젝트 그룹 휘파람

공연 장소: 예술공간 서울

공연 기간: 2012.09.08-2012.09.23

 

1.

     <귀뚜라미가 온다>2005년에 발표된 소설가 백가흠의 단편을 각색한 연극이다. 남성의 폭력성과 근친상간적 욕망이라는 도착적 징후들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수작이다. 문자언어를 시각언어로 전환함에 있어서 각색자는 극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구체적인 장면화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서술이 자유로운 소설과 구체적인 형상으로 시각화되어야 하는 연극은 많은 변별점을 발생시킨다. 본 연극의 특징은 연극성만을 드러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설에서 보여준 애매모호하게 처리된 상징적 기호들이 연극의 구체성을 통해서 명확하게 제시됨으로써 소설의 접근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 공간이 많은 텍스트이며 사유의 지속적인 틈입을 발생시킨다. 구멍 뚫린 빈 공간을 관객 개인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텍스트이다.

 

     능도라는 무인도에 바람횟집을 운영하는 살찐 여인과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며 동거중인 젊은 사내가 있다. 그들의 횟집은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달구분식과 맞닿아 있다. 달구분식에는 술만 먹으면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노총각 달구와 노모가 살고 있다. 밤이면 한 쪽에는 섹스의 교성이 새어나가고 이를 듣는 달구는 노모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바람횟집의 교성이 커질수록 어머니를 향한 달구의 폭력성도 커진다. 상반된 두 풍경은 각기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연상시킨다. 살찐 여인은 전어를 구입해 되팔아 돈 벌 생각에 기대로 부풀어 있고 달구 노모는 아들의 학대에 점점 지쳐간다. 이들의 상반된 희망과 절망은 귀뚜라미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에 의해 소멸된다. 태풍으로 인한 해일은 횟집 여자와 노모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해일을 피한 두 남자는 이를 지켜본다.

 

     공연을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김기덕의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하위주체들의 일상에 관한 전경화는 백가흠이 지속적으로 견지해오던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의 일상은 남성의 폭력성과 섹슈얼리즘이 전부이다. 엄마라고 호명하는 여자와의 섹스와 엄마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은 섹스와 폭력이 동전의 양면 같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또한 엄마와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아버지를 살해한 달구의 행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유사하다. 횟집 여자의 교성이 들릴 때마다 그의 폭력의 강도가 세어지는 것은 엄마를 향한 근친상간적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들의 행위가 있음직해 보이는 것은 아들의 욕망에 도화선을 제공하는 것이 옆집 남녀의 무분별한 성행위이며 이는 마치 먹는 것과 동일한 행위로 동물성을 연상시킨다. 또한 이들의 성적 욕망이 극대화되는 것은 자신들을 지켜보는 타자의 시선인 달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립된 공간에서 동물성만 지닌 인간들과 그들보다 못한 인간의 억압된 성적 욕망이 향하는 곳은 근친이건 아니건 상징질서의 위반이건 아니건 전혀 개의치 않다.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도 연일 각 매체의 한 귀퉁이에 지속적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처해진 환경에 의해 변주되는 인간의 동물성과 실존에 관한 물음은 자연주의와 실존주의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2.

     미장센이 중요한 연극이다. 무대정면을 벽돌을 잔뜩 쌓아놓았으며 집이라는 한정된 한 공간을 둘로 구획했다. 무대 한 가운데 전시된 작은 어항 앞에서 전어에 집착하는 횟집 여자의 모습과 달구의 폭력 앞에서 고무 다라이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노모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음습한 분위기를 각각의 소도구를 통해 충실하게 반영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무대공간이 집이라는 밀폐된 공간으로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과 소설 텍스트의 공간은 태풍의 눈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제시된다. 극적공간은 하위주체들이 파도에 휩쓸리듯 밀려 온 섬이라는 유폐된 공간이며, 언제 덮칠지 모르는 파도와 해일, 태풍 등으로 시시각각 불안의 전조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지점이 무대공간에서 드러나기 힘들었다. 음향이나 그 이외의 영상 이미지 등도 활용되었다면 극적인 분위기를 배가 시킬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을 남겼으나 소극장 무대의 현실적 한계 때문이라 여겨진다.

     각색이 지닌 어려움은 원작을 접한 수용자와 접하지 않은 수용자라는 두 층위의 관객을 포섭해야 한다는데 있다. 원작과의 비교는 각색된 매체의 태생론적 숙명이다. 각색의 과정에서 소설과 연극이 상동할 필요도, 할 수도 없다. 소설이 지닌 문학성과 연극이 지닌 연극성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이 담고 있는 모티프는 복원되어야 한다. 실존의 위기에 놓여있는 극단적인 고립감, 공포, 불안감은 서사를 끌고 가는 중요한 추동력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의 근친상간애, 섹슈얼리티는 원초적 동물성으로 전경화된다. 태풍인 귀뚜라미를 무대화하면서 배우이자 각색자인 장용철이 귀뚜라미로 분하며 구체적인 인물로 형상화되었다. 귀뚜라미의 독백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갖게 하는 설정은 협소한 무대 환경에서 고안해 낼 수 있는 최적의 의도이며 이색적인 요소로 작용했지만 한편으로는 몰입이 되지 않는 내러티브에 이를 배가시키는 난점이 되기도 했다. 관객이 지닌 개개인의 인식 능력에 따라 호불호가 엇갈릴 수 있는 공연이다.

 

3.

     무대공간이 한정적이어서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극이다. 노모 역을 맡은 권기대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병리적 징후를 내재한 하위주체인 달구역의 배우도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횟집 부부의 연기가 내면화되지 않고 표피적 차원에서 머무르는 듯 했다. 두 배우의 외적 마스크는 소설 속의 배역들과 일치했으며 배우로서의 개성적인 매력을 지녔으나 어색한 사투리가 극의 몰입을 깨트렸다. 귀뚜라미역의 장용철은 극의 시작을 열고 끝을 마무리하는 신적인 위치로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선사했다.  

귀뚜라미가 온다

귀뚜라미가 온다

최고 관리자 / 2012-10-20 / 조회수 8086

무대 위로 소환된 잔혹한 진실

프로젝트 그룹 휘파람, <귀뚜라미가 온다>

 

백소연(이화여대 강사)

 


각색: 장용철 (소설 원작: 백가흠)

연출: 박장렬

극단: 프로젝트 그룹 휘파람

출연: 장용철, 정종훈, 권기대, 오용택, 이선희

공연 장소: 예술공간 서울

공연 기간: 2012.09.08-09.23

 

     몇 년 전 백가흠의 첫 단편집을 끝내 다 읽지 못하고 중도 포기를 선언한 적이 있었다. 소설 속에 묘사된 과도한 폭력과 섹스로 얼룩진 상황들은, 그것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작가의 궁극적 의도를 망각하게 만들 만큼, 시종일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활자로 대면하는 일조차 견디기 힘든 마당에 이젠 그것의 무대화를 보아야 한다니, 객석에 앉아 연극 <귀뚜라미가 온다>를 기다리는 마음은 시작부터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원작의 의미를 잘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 지독한 상상력이 더욱 극단적인 불편함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 원작이 무대라는 제약을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을지, 이율배반적이게도 작품을 기다리던 불쾌함은 이내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소설의 첫 대목처럼, 연극 역시 앞으로 펼쳐질 배경과 상황을 시작 장면에서부터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대 위에 놓인 분할된 두 개의 공간은 극의 배경이 되는 횟집과 분식점의 풍경을 적절히 재현하였다. 앞으로 인물들이 처하게 될 절망적 상황을 암시라도 하듯, 고립된 섬 안에서마저 다시금 고립된 듯한 이 공간들은 더욱 더 허름하고 암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낡은 벽을 경계로 하나의 슬레이트 지붕 아래 놓인, 이 횟집과 분식점 안에는 각각 두 남녀와 모자가 동거 중이다. ‘바람 횟집의 남자는 뚱뚱한 연상의 여인을 엄마라 부르며 밤마다 섹스를 나눈다. 동시에 그와 이웃 한 달구 분식의 달구는 술에 취해 자신의 노모를 밤새도록 두들겨 패고 있다. 부푼 살집의 여자가 내는 킬킬거리는 낮은 웃음 소리와 날카로운 교성, 삭정이처럼 마른 노모가 내뱉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와 희미한 흐느낌은 벽을 사이로 두고 서로 교차되며 겹쳐진다. 기묘하게 빛나던 어스름한 조명 아래로 들리던 이 소리들은 극의 분위기를 초반부터 더욱 그로테스크 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였다.

     같은 지붕을 공유함으로써 하나로 연결되는 이들 사이의 가학과 피학의 고리는, 시종일관 기괴하며 병적인 상태로 이어진다. 모자 관계 혹은 유사 모자 관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이들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도한 폭력과 병적인 섹스뿐이다. 흔히들 위로와 평화를 얻는 유일한 안식처로 가족을 명명해 왔다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은, 결국 그 이름에 덧씌워진 허구와 미몽을 폭로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잔혹한 폭력과 도착적 섹스가 자행되는 이 곳이, 바로 현실의 벌거벗은 실상이자 세계의 축도(縮圖)라는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빠져나갈 출구 없이 고착된 절망적 분위기 안에서도, 남자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며 노모는 아들이 어엿한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바란다. 이러한 소박한 소망들은 작품 속 전어의 상징과 다시금 강력히 연결되고 있다. 인근 횟집 주인들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전어가 바람 횟집에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순간 흥성스러워진다. 좁은 수족관을 메운 전어를 바라보며 이들 모두는 제 나름의 희망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다.

     팔딱이는 전어들이 뿜어내던 은빛의 그 찬란함은 아름답고 강렬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짧고 허무한 것이기도 하다. 며칠 버티지 못하고 이내 죽어 버린다는 전어의 본디 속성처럼 살아남은 전어들이 점차 줄어감에 따라, 극은 다시금 파국으로 치달아 간다. 바람 횟집과 달구 분식의 사람들이 품었던 마음 속 작은 바람들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불어 극의 초반부터 조금씩 감지되던 태풍 귀뚜라미의 존재는 이들 곁으로 더욱 가까이, 더욱 강력히 다가오게 된다. 점차 사그라들던 그들의 작은 희망은 이제 강한 바람결에, 밀려드는 파도에 모두 쓸려 나가 버린다. 그리고 사라진 삶의 터전 위에서 남자들은 그들이 가학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를 통해 한 줄기 삶의 의미를 구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잠시 품었던 다른 변화의 가능성마저 부인하며 그 시작만큼이나 잔혹하게 마무리 된다.

     이처럼, 연극은 원작 특유의 서사와 분위기, 작의를 제한된 공간 안에서 어느 정도 충실히 구현해 내고 있었다. 또한 때때로 공간에 대한 연출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은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일례로, 아들의 폭력을 피해 노모가 숨어드는 분식점 내 좁은 장롱 틈을 고무 욕조로 적절히 대체한 부분을 들 수 있다.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이 작은 욕조는 궁지에 몰린 노모의 모습과 심리를 관객 앞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시각화 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기괴함과 잔혹함, 절망으로 직조된 극의 전체 분위기를 더욱 역설적으로 살려내야 할 전어의 이미지가 극 안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점은 결정적 한계로 비춰졌다. 물론, 전어 무리가 만들어 내는 은빛의 생생한 이미지들이란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만들어내기 힘든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내세운 좁은 어항 안에 든 작고 조야한 붉은 집의 모형은 못내 그 상상력과 이미지의 빈약함에 아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람 횟집과 달구 분식을 서서히 휘감아오던 태풍 귀뚜라미의 존재가 의인화 된 부분은 그로테스크함 속에서도 적절히 절제된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하고 있었다. 극 초반부터 건들거리듯, 특이한 몸짓과 말투를 반복하던 귀뚜라미는 바람의 존재를 느끼게 만들려는 듯, 무대 위 소품들을 슬며시 건드리며 인물들 사이를 있는 듯 없는 듯 배회했지만,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인상만을 남겼다. 극의 중간 중간 등장해 그가 읊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사들 역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잔인하고 도착적인 이 한 편의 연극을 보았다면 당연히 느끼고 고심했을 법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그 의미를 과연 직설적이며 단순한 대사들로 다시 되물었어야 했던 건지 끝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완성도 있는 하나의 원작을 타 장르로 전환하는 데에는 일정의 안정과 모험이 동시에 뒤따르게 된다. 그런데 뚜렷한 장르적 차이를 넘어야 하는 경우라면, 원작에 대한 깊은 고민과 재해석이 있지 않는 한, 그것의 충실한 재현 그것을 성취하는 것만도 간단치 않은 일일 것이다. 소설 <귀뚜라미가 온다>가 보여줬던, 불온한 이미지들로 가득 찬 거침없는 묘사는 연극으로 옮겨지면서 그 수위가 일정 정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연극 <귀뚜라미가 온다>는 이 끔찍한 수성(獸性)의 세계를 재현할 다른 적절한 수단들을 충분히 동원해 내지는 못했다. 무대 위로 소환된 잔혹한 진실의 모습은, 여전히 원작의 그것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인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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